병목
Claude Code와 다른 코딩 에이전트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뒤부터 자판을 두드리는 횟수와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인류의 손가락 관절 질환은 더 늘어나지 않을까.
처음에는 내 생각 몇 줄만 치면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 그저 즐겁고 좋았다. 코딩 에이전트와 대화하는 양이 늘자 금세 답답하고 불편해졌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렇게 나약하고 간사하다. 타이핑 자체가 병목이 된 것이다.
손이 느린 게 문제인 줄 알았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키보드로 옮기는 속도가 내가 코딩 에이전트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다. 속도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내 머리에 있는 생각을 키보드로 옮길 때 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만들어가면서 그 생각이 온전한 문장으로 적힐 만한지도 가려낸다. 계속되는 ‘편집’과 ‘첨삭’, ‘검열’이다. 통틀어 ‘정제’라 하겠다. 이 정제에서 잘려 나가는 것이 있다. 아직 글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생각,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생각, 글로 옮기기에는 너무 적나라하고 창피한 생각. 텍스트에 도달하기 전에 모난 돌처럼 정을 맞는다.
잘려 나가는 것들이 모두 쓸모없고 가치 없는 것이라면 상관없다. 문제는 너무 일찍 자른다는 것이다. 생각이 완성되기도 전에 편집하고 첨삭하면서 문장이 될 자격부터 심사한다. 생각을 만들어내는 일과 정제하는 일을 동시에 잘 해내기는 어렵다. 적어도 내 뇌로는. 병목은 손이 아니라 여기였다.
말할 때는 조금 다르다. 글로 적는 것보다 말로 쏟아내는 게 빠르기도 하지만, 정리 안 된 덩어리째 나오니 맥락이 덜 잘린다. 문장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면서도 일단 말을 시작할 수 있고, 앞에서 한 말을 뒤에서 고치거나 전혀 다른 곳으로 샐 수도 있다. 글을 쓸 때라면 도착하기 전에 지웠을 생각도 말에는 남는다.
말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꺼내놓는 것, brain dump다. STT가 좋아져서 가능해진 일이다.
그렇게 쏟아낸 말은 지저분하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말하는 과정에서의 생각들의 점진적 형성에 대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뒤죽박죽으로 말했다고 해서 생각도 뒤죽박죽이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뒤죽박죽으로 말한 것이 가장 또렷하게 생각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brain dump다. 지저분해도 덜 잘린다.
같은 글에 이런 문장도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식욕은 먹으면서 생긴다’고 한다. 이걸 비틀어 ‘생각은 말하면서 생긴다’고 해도 그대로 맞다.
말하다 보니 생각이 생긴다. 적어도 어떤 생각은 그렇다. 시작할 때는 모호한 아이디어나 거친 감정뿐이었는데 문장을 이어가다 보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무언가를 알고 싶은데 골똘히 생각해서는 찾을 수 없거든, 친애하는 총명한 친구여, 가장 먼저 마주치는 지인에게 그 얘기를 해보라고 권하겠다. 꼭 머리가 예리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에게 물어보라는 뜻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네가 직접 그에게 먼저 얘기해야 한다.
상대방이 답을 주기 때문이 아니다. 막연하게만 있던 생각이 말로 시작과 끝을 갖추어가는 동안 점차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클라이스트의 방법에는 마주 앉을 상대가 필요하다. 그는 시작한 문장을 끝내야 한다는 강제와 끼어들려는 상대의 압박도 생각을 또렷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지만, 내가 빌리는 것은 하나뿐이다. 무엇을 말할지 모른 채 시작해도 된다는 허락. 1805년에는 그 상대가 사람뿐이었다.
지금은 그 상대가 손끝에 있다. 듣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언어 모델은 ‘말이 안 되는 말’을 ‘말이 되게’ 정제하는 일을 이상하리만치 잘한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잔뜩 쏟아내도 그 안에서 의도를 찾아 구조를 만든다. 때로는 나 자신보다 내 말을 더 잘 알아듣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기도 하다.
내 생각의 초기 정제도 그쪽에 외주를 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미 나보다 정제를 잘하는 존재에게 내 생각을 아등바등 정제해서 넘겨야 할 이유가 굳이 어디에 있는가. 내가 정제해 넣는 대신,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쏟아 넣고 초기 정제부터 맡기면 더 간단하지 않은가.
바뀐 것은 정제를 누가 하느냐뿐이다. 생각의 주인이 바뀐 것은 아니다. 전에는 생각을 문장으로 정리한 뒤에야 AI 도구에 넣곤 했다. 이제는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쭉 꺼내 놓고, 초기 정제부터 언어 모델에 맡긴다. 남길지 버릴지, 맞는지, 어떻게 내보낼지는 여전히 내가 정한다. 그 판단을 생각이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할 필요가 없어졌을 뿐이다. 정제가 없어진 게 아니라 늦춰진 것이다. 늦춰진 정제는 생각을 자르지 않는다. 이미 다 나온 뒤니까.
주인으로 남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모델은 내 말에 대체로 잘 동의한다. 무엇에든 동의하는 상대의 동의는 정보가 없다. 클라이스트의 지인도 생각을 꺼내 주는 역할이지 판단해 주는 역할은 아니었다. 정제는 넘겨도 검토는 못 넘긴다. 매끈하게 돌아온 문장은 정제가 끝난 것이지 검토가 끝난 게 아니다. 그걸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딸깍’만 반복했다가는, 정제를 외주한 게 아니라 생각을 외주한 것이 된다.
근래의 AI 담론에서 ‘병목’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빠르게 발전하는 모델의 성능과 거기서 쏟아지는 결과물을 감히 가로막는 병목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하드웨어를, 누군가는 규제를, 누군가는 인권을, 또 누군가는 인간 그 자체를 병목으로 든다.
내 경우에는 내 생각을 손으로 옮기는 것 자체가 병목이었다. 느렸고, 옮기다 맥락이 잘려 나갔다. 하드웨어와 규제와 인류 옆에 놓으면 초라한 병목이다. 키보드 하나다. 그런데 앞의 것들은 내가 어쩔 수 없고, 이건 내가 어쩔 수 있었다. 큰 병목을 걱정하는 글은 이미 많다. 나는 작은 것 하나를 치웠다. 그러려고 만든 것이 sori다.